톰 브라운, 가장 보수적인 수트의 재해석
톰 브라운(Thom Browne, 1965~)은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다.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브랜드 톰 브라운의 설립자이자 수석 디자이너다. 그는 전통적인 남성 정장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현대 패션에서 ‘수트’라는 아이템이 지닌 의미를 근본부터 다시 묻는 디자이너로 평가받는다. 빨강, 흰색, 파랑의 삼색 그로스그레인(RWB)과 네 줄의 4-Bar 스트라이프는 오늘날 톰 브라운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언어다.
배우를 꿈꾸던 청년에서 디자이너로
톰 브라운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엘렌타운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윌리엄 알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인디애나주에 위치한 노터데임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대학 수영팀 선수로 활동할 만큼 체육적 배경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이력에서 흥미로운 점은, 처음부터 패션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88년 톰브라운은 배우가 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그러나 연기라는 세계에서 뚜렷한 방향을 찾지 못했다. 결국 1997년 뉴욕으로 이주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시기 그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쇼룸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며 처음으로 패션 산업의 현장을 경험한다.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판매하고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배운 셈이다.
이후 랄프 로렌 산하 브랜드 클럽 모나코(Club Monaco)로 자리를 옮기며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개발팀을 이끌며 랄프 로렌의 클래식한 아메리칸 스타일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이는 훗날 톰 브라운 특유의 수트 미학의 기초가 된다.
다섯 벌의 수트로 시작된 브랜드
톰 브라운은 2001년, 뉴욕에서 단 다섯 벌의 맞춤 수트를 사전 주문 방식으로 제작하며 자신의 브랜드를 시작했다. 화려한 런웨이나 대규모 컬렉션 대신, 철저히 ‘수트’라는 아이템 하나에 집중했다. 2003년부터는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을 선보이며 점차 브랜드의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
톰브라운은 1950~60년대 미국 남성들의 회색 플란넬 수트의 전통적인 형태를 과감하게 변형했다. 짧아진 재킷 길이, 발목이 드러나는 크롭트 팬츠, 정확히 계산된 비율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인상을 남긴다. 그는 클래식을 따르되,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 랄프 로렌과 타미 힐피거 중심의 보수적인 미국 패션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톰 브라운은 미국 남성복에 새로운 긴장감을 불어넣은 디자이너로 평가받으며, 2006년 CFDA, 2008년 GQ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수상한다. 이후 2013년에도 다시 한 번 CFDA를 수상하며 입지를 굳혔다.
유니폼, 동조, 그리고 반란
톰 브라운의 수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유니폼’이다. 그의 회색 수트는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모두가 동일해 보이는 동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보수성과 집단성을 상징하는 디자인 언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 유니폼이 현대 사회에 등장할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수트를 입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시대에, 전통적인 수트를 선택하는 행위는 오히려 반항이 된다. 톰 브라운의 수트는 전통을 기준 삼으면서도, 동시에 그 전통을 전복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여기에 수트에 반바지를 매치한 스타일은 1950~60년대 미국 남자아이들의 교복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성숙함과 미성숙함, 권위와 유희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이것이 바로 톰 브라운 디자인의 핵심이다.
4-Bar와 RWB, 브랜드의 언어
톰 브라운의 거의 모든 제품에는 4-Bar 스트라이프와 빨강·흰색·파랑(RWB) 그로스그레인 리본이 등장한다. RWB 그로스그레인은 그가 리본 매장에서 우연히 세 가지 색이 나란히 놓인 그로스그레인을 보고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프랑스 국기를 연상시키는 이 색 조합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초기에는 스트라이프가 세 줄이었으나, 아디다스와의 소송 이후 네 줄로 변경되며 현재의 4-Bar가 완성되었다. 이 역시 톰 브라운 브랜드가 거쳐온 현실적인 선택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성장과 변화, 그리고 논란
브랜드 초창기 톰 브라운은 의류 택에 직접 연도, 판매처, 고객 이름을 손으로 적을 정도로 수제작과 장인정신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곧 경영 위기로 이어졌고, 일본 의류 기업 크로스 컴퍼니의 대규모 투자를 통해 브랜드는 회생한다.
이후 디자인은 일본 시장의 취향에 맞게 변화했고, 대량 생산 체제로 전환되며 품질이 초기보다 떨어졌다는 평가도 함께 등장했다. 오늘날 시그니처로 알려진 삼색 그로스그레인 역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수트 중심에서 벗어나 캐주얼웨어, 니트, 아우터 등 보다 폭넓은 아이템을 선보이고 있다.
2018년 8월, 톰 브라운은 브랜드 지분 85%를 에르메네질도 제냐 그룹에 약 5억 달러에 매각하며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톰 브라운이 남긴 질문
톰 브라운은 옷으로 질문을 던지는 디자이너다.
‘남성다움이란 무엇인가’,
‘전통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
‘동조는 안정인가, 굴레인가’.
그의 수트는 여전히 회색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단조롭지 않다. 톰 브라운은 가장 보수적인 옷으로, 가장 급진적인 질문을 던져온 디자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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