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악동, 혁신의 아이콘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패션은 늘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그 변화의 중심에 서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는 기존의 규칙을 과감히 부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인물로 손꼽힌다. ‘패션계의 악동’이라는 별명처럼, 그는 성별·계급·전통이라는 경계를 허물며 패션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왔다. 그의 별명은 패션의 규칙을 뒤집는 방식으로 커리어를 쌓아온 태도에서 비롯됐다.
남성에게 치마를 입히고, 코르셋을 런웨이의 중심으로 끌어올리고, 거리의 '평범한 사람'을 마네킹처럼 무대에 세우며 장 폴 고티에는 언제나 '패션이 지켜야 할 선'을 의도적으로 흔들었다.
장 폴 빅터 라울 고티에는 파리 근교 바뉴에서 비교적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회계사 아버지와 비서였던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고티에에게 바느질을 가르쳐 준 할머니의 존재가 그의 감각에 큰 영향을 줬다고 알려져 있다.
첫 컬렉션의 시작, 그리고 재기의 서사
15세 무렵 장 폴 고티에는 아동복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했다. 영화 팔발라(Falbalas)를 본 뒤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이브 생 로랑에게 스케치를 보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고티에는 여기서 꺾이지 않았고, 스케치를 피에르 가르댕에게 보낸다.
그리고 18살 생일 무렵, 그는 피에르 가르뎅의 아틀리에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하게 된다. 이후 ORTF 방송 촬영을 가르뎅과 함께하기도 했다.
이후 장 폴 고티에는 피에르 가르뎅, 자크 에스트렐, 장 파투 등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부티크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여러 하우스를 거치며 실무를 익힌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컬렉션을 시작하게 된다. 일본의 카시야마 기업이 그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고, 이 지원을 바탕으로 장 폴 고티에는 패션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첫 번째 라인업의 실패로 큰 빚을 떠안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계기 역시 카시야마 기업이었다. ‘제임스 본드’ 라인의 디자인 제안은 고티에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었고, 이후 그는 점차 자신만의 색을 확고히 해 나간다.
1980년대, 패션의 규칙을 뒤엎다
1980년대는 장 폴 고티에가 패션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한 시기다. 그는 남성에게 여성복을 입히고, 거리에서 만나는 ‘마네킹’에게 여성 코르셋을 착용시키는 등 기존의 성 역할과 미적 기준을 과감히 뒤집었다.
특히 1983년 처음 선보인 ‘마리니에르(스트라이프 톱)’는 그의 상징이 되었고, 2년 뒤에는 남성용 치마를 발표하며 패션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고전적인 쿠튀르 테크닉을 완벽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를 전복시키는 방식은, 장 폴 고티에만의 강력한 무기였다.
향수, 음악, 대중문화와의 결합
1990년대는 고티에가 런웨이 밖으로 영향력을 확장한 시기다. 이때 장 폴 고티에 향수가 등장했고, 대중문화와의 결합이 더욱 강해졌다. 특히 마돈나가 착용한 원추형 컵 코르셋 이미지는 고티에의 ‘아이콘화’를 결정적으로 밀어올린 사건으로 자주 언급된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 파트너였던 프란시스 메뉴지의 사망(에이즈)이 알려져 있으며, 이후 고티에는 거리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데님 중심 라인(고티에진) 등 다양한 확장 라인을 시도한다. 성공과 실패가 교차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고티에는 늘 “패션을 현실과 연결하는 방식”을 놓치지 않았다.
에르메스와의 협업, 그리고 브랜드 확장
2004년부터 약 6년간 장 폴 고티에는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는 동시에 에르메스 여성 기성복의 예술 감독을 맡는다. 이 시기 그는 아동복, 데님, 유니섹스 라인 등 다양한 보완 라인을 전개했고, 이탈리아 브랜드 페를라와 협업해 고급 란제리 컬렉션도 선보였다.
2000년대 후반에는 액세서리, 가죽 제품, 신발, 안경 등으로 제품군을 넓히며 종합 패션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어린 시절이 만든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인생을 바꾼 존재는 할머니였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우며 패션에 대한 감각을 키웠고, 여섯 살 때는 장난감 곰에게 옷을 입히며 상상력을 펼쳤다. 할머니의 트렁크에서 발견한 코르셋은 훗날 그의 브랜드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된다.
15세 무렵 그는 디자이너의 꿈을 품고 스케치를 시작했고, 이브 생 로랑에게 보낸 작품은 거절당했지만 피에르 가르뎅의 눈에 띄며 18세에 견습생으로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다.
오뜨 꾸뛰르에 대한 헌신
2014년, 장 폴 고티에는 기성복 제작을 중단하고 오뜨 꾸뛰르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기성복의 세계는 상업적 제약과 빠른 유행 변화로 인해 더 이상 혁신에 필요한 자유와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패션의 본질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패션계의 악동, 그리고 문화적 아이콘
언론은 그를 ‘패션계의 악동’이라 부르지만, 장 폴 고티에는 프랑스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시대를 앞서간 혁신가다. 전통적인 헤어스타일과 파격적인 디자인,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 정신은 그를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닌 하나의 역사로 만들었다.
패션을 통해 자유와 다양성을 말해온 장 폴 고티에. 그의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겨온 기준은 정말 당연한가?”
'스타일 스토리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빨간 밑창이 만든 전설, 크리스찬 루부탱 (1) | 2026.01.05 |
|---|---|
| 셀린느(CELINE), ‘아동 신발’에서 ‘하이엔드 하우스’로 (1) | 2026.01.04 |
| 프라다, 반전의 역사로 완성된 지적 럭셔리 (0) | 2026.01.04 |
| 톰브라운, 가장 보수적인 수트의 재해석 (0) | 2026.01.03 |
| 이브 생 로랑, 패션을 해방시킨 디자이너의 삶 (0) | 202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