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생 로랑, 패션을 해방시킨 디자이너의 삶
이브 앙리 도나 마티외 생 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은 1936년 8월 1일,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나 2008년 6월 1일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다. 한국에서는 흔히 ‘입생로랑’으로 불리지만, 정확한 표기는 이브 생 로랑이다. 그는 20세기 패션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 오트 쿠튀르를 시대와 사회로 끌어내린 혁신가였다.
디올의 후계자로 등장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은 젊은 시절을 오랑에서 보내며 일찍부터 패션과 예술에 재능을 보였다. 파리 의상 조합 학교에 잠시 재학한 뒤, 1955년 보그 프랑스 편집장이던 미셸 드 브뤼노프의 눈에 띄어 크리스티앙 디올(Chriatian Dior)에게 소개된다. 그렇게 그는 디올 하우스의 어시스턴트로 패션계에 입문한다.
1957년, 크리스티앙 디올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당시 겨우 21살이었던 이브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다. 이듬해인 1958년 1월, 그는 첫 컬렉션 '트라페즈(Trapeze)'를 발표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젊은 디자이너의 데뷔작으로는 이례적인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그가 디올에서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1960년 징병되어 파리 발 드 그라스 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그 사이 디올 하우스는 그를 면직시켰다.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마르크 보앙(Marc Bohan)에게 넘어갔다. 이 사건은 생 로랑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이브 생 로랑 하우스의 탄생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e)와 손잡고 자신의 이름을 건 패션 하우스를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미국 기업가 J. 맥 로빈슨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1961년 브랜드를 공식 출범했다. 로고 디자인은 그래픽 디자이너 카상드르(Cassandre)가 맡았다.
1962년 1월 29일, 파리 스폰티니 거리에서 이브 생 로랑의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공개되었다. 이후 12년간 이곳은 생 로랑의 창작 중심지가 된다. 그는 이 시기 카방 코트와 트렌치코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클래식한 아이템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1966년은 그의 커리어에 가장 결정적인 해였다. 여성에게 턱시도 수트인 '르 스모킹(Le Smoking)'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전까지 남성복의 전유물이었던 바지 정장, 재킷, 테일러링을 여성복에 도입한 것이다. 이어 사파리 재킷 ‘사하리엔느’, 점프수트, 시스루 블라우스 등은 여성에게 새로운 자신감과 힘을 부여했다. 이브 생 로랑은 60년대와 70년대에 패션 산업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패션의 민주화를 이끈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오트 쿠튀르가 소수의 부유층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966년,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최초의 기성복 부티크 ‘Saint Laurent Rive Gauche’를 파리에 오픈한다. 이는 패션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기성복 라인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리브 고쉬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매장은 프랑스 전역은 물론 1968년 뉴욕, 1969년 런던까지 확장되었다. 같은 해 남성복 부티크도 문을 열며 브랜드는 본격적인 글로벌 패션 하우스로 성장한다.
예술과 문화에서 얻은 영감
이브 생 로랑의 컬렉션은 언제나 예술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1965년 몬드리안 원피스, 1966년 팝아트 컬렉션, 이후 피카소, 마티스, 반 고흐, 브라크, 콕토, 아폴리네르에 대한 오마주까지 그의 런웨이는 하나의 움직이는 미술관이었다.
또한 그는 아프리카, 아시아, 러시아, 일본, 인도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영감을 얻었다. 특히 모로코는 그의 인생과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장소였다. 1966년 처음 방문한 이후 매년 컬렉션 준비를 위해 마라케시에 머물렀고, 1980년에는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마조렐 정원을 매입해 보존했다.
시대를 앞선 감각과 영향력
이브 생 로랑은 흑인 모델들을 런웨이에 세운 최초의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성별·인종·계급의 경계를 허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빅투아, 베티 카트루, 카트린 드뇌브 등 수많은 뮤즈들과 함께하며 여성의 다양한 얼굴을 패션으로 표현했다.
1983년, 다이애나 브릴랜드의 제안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살아있는 디자이너로서 메트에서 전시를 연 최초의 사례였다. 이후 전시는 베이징, 도쿄, 모스크바, 파리 등 세계 각지로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패션을 살다
1990년대 후반, 그는 기성복 작업에서 점차 물러나 오트 쿠튀르에 집중했고, 2002년 7월 1일 공식 은퇴를 선언한다. 같은 해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마지막 쇼는 40년 패션 인생을 총망라한 헌사였다.
2008년 6월 1일, 이브 생 로랑은 파리 자택에서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정치·문화·패션계를 대표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참석했고, 유골은 그가 사랑했던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에 뿌려졌다.
이브 생 로랑은 옷을 통해 여성을 해방시킨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지금도 패션은, 그의 질문 위에서 계속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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